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돌프 히틀러 (문단 편집) === 인종주의 === >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는 처음에는 [[반자본주의]]적 색깔을 띠다가 1920년대 중반이 되면 유대인을 소련 및 공산주의자들과 연결하는 쪽으로 바뀐다. 자본주의의 배후에 유대인이 있다는 주장을 버리고 공산주의의 배후에 유대인이 있다는 쪽으로 말을 바꿔 탄 것은 아니었다. 증오에 사로잡힌 히틀러의 머리에서 둘은 공존했다. 그렇게 지독한 증오는 공포심이 없다면 생겨날 수가 없었다. 국제 금융 자본과 소련 공산주의를 모두 조정할 수 있는 막강한 집단을 상상했을 때 느껴지는 적대감이었다. 국가사회주의도 감당하기 벅찰 만큼 강력한 '유대인의 세계 음모'가 있다는 고정관념이었다. >---- > 히틀러 1권 (p. 368) 히틀러는 권좌에 오르기 전부터 죽는 순간까지 '유대-볼셰비즘'을 철천지 원수로 여겼다. 지금으로선 우습지만 당시 우익 진영에선 유대적이란 말과 볼셰비즘이 동일한 개념으로 통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 경제적 고립과 내부로부터의 중상을 유대인과 연관지어 독일인의 증오를 유발시키는데 성공했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양면전쟁]]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소련]] 공격을 결심한 이유도, '유대볼셰비즘'에 대한 비이성적인 증오가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소련의 고위직에는 몰로토프 이전 외무장관이었던 [[https://en.wikipedia.org/wiki/Maxim_Litvinov|막심 리트비노프]] 등 유대인도 상당수 포진해 있었다. 스탈린은 유대인을 배려하지는 않았지만 소수민족으로서 받는 탄압 이상의 차별도 없었다. [* 스탈린이 필요 이상으로 유대인을 숙청하고 탄압하기 시작한 것은 1948년 이스라엘 독립 이후다.] 때문에 그의 관점에서 약간의 논리적 비약을 거치면 소련은 '유대인'과 '볼셰비키'가 지배하는 '악의 소굴'이나 다름없는 국가였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인류 역사는 계급 투쟁이 아닌 인종 투쟁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는 인종성을 순종으로 유지하지 않고 잡종이 돼버린다면 그 민족은 망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흑인이 독일말을 배우고 독일말에 익숙해졌다해도 독일인이 될 수도 없고 유대인들도 기독교로 개종해도 절대 독일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독일말을 잊어버리고 200년 전 러시아로 이주한[*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 독일 루터교도들이 러시아로 많이 이주했다. 스탈린 시대 볼가 강 지역에 50만명의 독일계 주민이 남아 있었다.] [[독일계 러시아인]]들은 독일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민족의 구분이 문화나 언어가 아닌 인종이다. 민족성 강조도 인종주의에 기반한다. 히틀러의 유대인 혐오는 1차 세계대전 전의 오스트리아 제국의 가톨릭 교육과 사회 전반에 만연한 반유대주의, 그가 살던 빈 내 과격파들의 유대인 척결론, 1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독일 내 부각되었던 여론을 따랐던 것이 가장 크다는 것이 학계의 설명이다. 반유대주의 성향은 1905년에서 1914까지 빈에서 지냈던 시절부터 형성되었다고 보인다. 이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의 시장은 [[오스트리아 국민당]]의 전신인 오스트리아 기독사회당의 창당자 카를 루에거(Karl Lueger)[* 철자로 인해 '뤼거'로 표기되기도 하나 독일어 발음은 '루에거'에 가깝다. [[http://de.wikipedia.org/wiki/Karl_Lueger|#]]]라는 반유대주의자로 1897~1910년까지 빈의 시장으로 재임했다. 열성 가톨릭 신도로 우파성향의 정치인이었지만 사회복지와 연방주의도 같이 주창해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루에게를 좌익으로 생각하고 2년이나 임명을 거부한 전력도 있다. '''누가 유대인인지는 내가 결정한다'''는 유명한 어록이 있는데, 이는 빈의 부유한 유대인들은 안심시키고 혹은 냅두고 제정 러시아의 유대인 탄압을 피해 내려온 코가 크고 검은 머리에 독일어를 못하고 튀는 외모의 유대인들만 탄압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그는 연설 등에서 시도 때도 없이 유대인 음모론을 주장하고 차별을 정당화하며 인기를 얻었다.[* 물론 단순히 반유대주의자라서 지지를 얻은 것은 아니고, 우파정치인임에도 사회복지제도를 선도적으로 도입하면서 상하수도와 전기같은 기초 인프라 시설들을 대거 확충해서 인기를 얻었던 것이기도 했다. 히틀러가 소식적에 복지당을 꽤 타서 생계를 꾸려나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히틀러도 루에거의 덕을 독특히 본셈이기도 했다.] 나의 투쟁에 따르면 당시 히틀러는 남는 시간을 "독서"로 보냈다고 하는데, 그가 읽는 책들은 주로 인종주의적인 팜플렛이거나 혹은 과격한 정치단체의 선전물들이었다. 이때부터 그가 유대인을 병적으로 증오하기 시작하게 되었다고 보인다. 이를 두고 히틀러 전기작가 이언 커쇼는 "뮌헨에서도 그랬고 빈에서도 그랬고 히틀러에게 독서란 깨닫거나 배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선입견을 다지는 수단이었다"고 촌평했을 정도다. [[반유대주의]]는 이 시대 유럽의 보편적인 감정이었다. 오히려 히틀러가 살던 독일-오스트리아 지역이 그나마 덜한 편이었다. 반유대주의는 영국이나 프랑스도 상당했다. [[드레퓌스 사건]]만 봐도 당대 서유럽의 반유대주의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가톨릭 교회의 세가 강한 남유럽, [[이탈리아]], [[스페인]]은 더 심했다. 끝판대장격은 [[러시아 제국]]으로 조직적인 유대인 탄압과 학살(일명 [[포그롬]])을 펼쳤다. [[폴란드]] 및 [[발트 3국]]도 러시아와 사정이 비슷했다. 차르 시대에 대한 반감과 빈부격차 등 사회모순을 유대인 탓으로 돌리는 선동꾼들도 있었다. 러시아 정교회는 반유대교육을 실시했으며 정부는 이를 방조했다. 게토 지역에는 살인, 약탈, 강간, 방화 등이 빈번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상대적으로 탄압이 적은 다민족 다언어 국가인 오스트리아로 많이 이주했다. 이주 유대인들은 빈의 골목 지역에 주로 살았는데, 상대적으로 낮은 교육 수준과 언어 장벽 때문에 뒷골목에서 매춘, 소매치기, 구걸 등으로 연명하는 하층민들이 증가한다. 이들이 유대인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켰으며, 반유대주의 선동까지 더해져서 상황은 더 나빠진다. 유대인은 부유하다는 편견 때문에 당시의 상황이 와닿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도 부유한 사람은 소수다. 서방 금융권에서 유대계의 비율이 높긴 하나 그 수많은 유대인 인구가 다 금융계의 거물들일 리 만무하다. 미국 뉴욕에만 해도 유대인 마을은 [[브루클린]]에 있다. 브루클린은 개발되고 치안이 안정되기 전까지는 가난한 동네였다. 청나라가 개막장일 때 이주해 온 사람들이 세운 차이나타운과 아일랜드가 감자대기근을 겪을 때 이주해 온 이들이 세운 헬스키친도 위치는 맨하탄에 있다. 부유한 사람은 해외로 이주하는 등 발빠르게 행동했으며, 그들 중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자들도 최후에 그 자리에 갔다. 언제나처럼 가난한 자들이 먼저였다. '헤르만 뢴스', '디터 에크하르트', '빌헬름 폰 폴렌츠' 등은 반유대적인 농민소설을 쓴 작가다. 이들은 유대인들을 고리대금업자, 가축상인, 중개인 등으로 묘사했다. 20세기 초반 40쇄를 찍을 정도로 엄청나게 팔린 '테오도어 프리치'의 <반 유대주의 문답서>는 후에 나치에서 위대한 교사라 칭할 정도였다. 이런 작품들이 아돌프 히틀러의 독서 취향이었다.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은 1916년 독일에 귀화한 영국인이다. 영국 해군제독의 아들로 태어났고 영국 육군원수 네벨 체임벌린의 조카뻘이 된다. 반유대주의자 프랑스인 고비노 백작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독일 음악가 리하르트의 사위가 된다. 그는 게르만빠로 반유대주의자였는데, 아돌프 히틀러는 그의 주장에 깊이 공감했다. 1927년 체임벌린이 임종시엔 아돌프 히틀러가 직접 손에 입을 맞춰줄 정도였다. 일부 심리학자들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들어 아버지와의 불화가 유대인에 대한 증오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그가 유난히 유태인을 싫어했을 만한 이유는 찾을 수 없다. 일부에선 어렸을 때 유태인한테 [[강간]]당했다느니, 혹은 어머니가 유대인과 바람을 피웠느니 아버지가 실은 유태인이었는데 아돌프 히틀러를 못 살게 굴었다느니 하지만 앞서 밝힌 대로 근거 없는 이야기다. [[반유대주의]]는 그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 유럽에 보편적인 정서였다. 히틀러도 독자적인 반유대주의를 창시했다기보다는, 수천년동안 유럽에 만연한 반유대주의에 영향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주로 금융업과 보석세공업에 종사하며 여기저기 이주하였던 유대인들이 돈줄을 쥐고 유럽 도시들에 영향을 미쳤다는 금융자본주의 담론은 이미 18세기부터 어느 정도의 축적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노숙자로 살던 시절에 주로 거래하던 화상(畵商)이 유대인이었고, 심지어 이후 겪게될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전우 중에 유대인이 있었으나, 그와 사이는 특별히 나쁘지 않았다. 거기다 그때 받았고 이후 그가 평생 자랑하던 철십자 훈장을 주도록 추천해줬다는 설의 주인공이자, 히틀러의 상관이었던 후고 구트만도 유대인이었다. 후고 구트만 역시 아돌프 히틀러 집권한 후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수난을 당한 적이 있으나 부대 전우들의 청원으로 석방되고, 이후 미국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진짜인지 그냥 비유적인 표현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빈으로 상경하기 전엔 유대인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한 적도 있다. 물론 이는 사실은 아니다. 히틀러의 학교 동창 증언으론 빈으로 상경하기 전에 이미 반유대주의에 빠져있었고 린츠와 아돌프 히틀러가 다닌 학교에서도 유대인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이언 커쇼의 연구 등을 종합해본다면 빈 상경 이전~빈 체류 시절에 히틀러는 반유대주의에 어느 정도 빠져 있긴 했지만 당시 유럽 전반에 유행하던 반유대주의의 흐름을 고려할 때는 특출나진 않은 편이었다. 반유대주의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으나 유대인에 대한 일부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거나 [[멘델스존]]을 비롯한 유대인 예술가들을 호평하기도 했다고 한다. 동유럽과 소련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슬라브]] 민족은 게르만 민족에 비해 열등하다고 여겨졌다. 히틀러는 '인종적 검사'를 통해 '가치'가 판명된 슬라브인들에 한해 간단한 셈법과 교통 표지판을 알아볼 정도의 기초적인 교육만 시켜서 독일인들의 노예로 부려먹고, 나머지는 우랄산맥 밖으로 추방하며 굶어죽든말든 개의치 않겠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동유럽]]에서는 차마 눈뜨고 못볼 [[독소전쟁|인세지옥이 실현된다]]. 막상 독소전이 개시되고 아리안인의 후손들이 동장군에 고생하자 나약함을 질타하고 열등했다고 주장했던 슬라브인들의 "인종적 강인함"을 찬양하는 등 오락가락 맛탱이가 갔다. 다만 나치당 내부에 슬라브계 간부들도 있었다. 나치당 교육부장이었던 [[알프레드 로젠베르크]]는 러시아계 피가 섞인 발트 독일인이었고, [[바르샤바 봉기]]에서 봉기 진압을 맡은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는 폴란드계였다. 반면 [[서유럽]]과 [[북유럽]]에서는 그나마 온정적이었다. [[영국 본토 항공전]]을 앞두고 [[영국]]에 '저런 하등한 인종 돕는다고 서로 싸우지 말고 우월한 우리들끼리 잘 살아보자'며 화해 의사를 피력했다. 물론 당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이를 거절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또한 북유럽에 속하는 [[노르웨이]]·[[덴마크]]·[[스웨덴]]·[[네덜란드]]·[[벨기에]]의 [[플란데런]] 지역은 인종적 가치가 독일 민족과도 비슷하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특히 한때 독일계 민족국가의 영토였던 벨기에의 오이펜-말메디, 프랑스의 [[알자스-로렌]], 19세기 독일 연방에 속했던 [[룩셈부르크]] 지역의 거주자들은 조부모 중 두 명 이상의 혈통이 확인되면 '명예 아리아인' 인증을 했다. 독일군 입대시 독일 국적도 부여했다. 물론 히틀러의 모든 논리는 독일인은 가장 우월한 인종이라는 대전제 하에서 이루어졌으며, 다른 민족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독일 민족과 얼마나 많은 유사점을 가졌는가"에 기초하여 이루어졌다. 일례로 [[프랑스]]는 골 족과 게르만 족의 피가 섞인데다 라틴 민족도 포함되어 있으니 그만큼 더 열등하다고 여겨졌다. 요아힘 C. 페스트는 자신의 저서 《몰락》(한국판: 아돌프 히틀러 최후의 14일)에서 구체적인 사상은 존재치 않고 오직 파괴와 증오만 존재하였다고 간략하게 그의 사상을 설명했다. [[파일:attachment/e0080644_475ace925dcb8.jpg]] 킴벌리 코니시는 '비트겐슈타인과 아돌프 히틀러'라는 서적을 발표한다. 여기서 린츠에서 자랄 때 학생 시절의 유대인 급우이자 훗날 세계적인 철학자가 되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혐오로 인해 유대인을 몰살하려는 충동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다만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는 같은 학교 동기라는 외에는 충돌할 지점이 적었다. 실제 학교만 같지 학년은 달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